산같은 정의, 강같은 진실

요즘처럼 직장 잡기도 자영업 하기도 힘든 마당에 그의 다채로운 사회 경력은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20대 후반 서울신문 청주 주재기자로 첫 걸음을 뗀 뒤 10년만에 훌훌털고 자신만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때 대박의 꿈을 꿨던 부동산 컨설팅업에서 쓴잔을 들이켠 뒤 자신이 배운 ‘도둑질’을 활용하기로 했다. 2004년 대입 논술전형이 생기면서 기자 경력을 내세워 청주에 논술전문학원을 열었다. 학원을 2개로 늘리면서 시작은 ‘돼지꿈’ 이었지만 끝은 ‘개꿈’이 됐다.

▲ 질좋은 생삼겹살과 푸근한 충청도 인심으로 승부하겠다는 김동진 대표와 일손이 부족할 때면 도우미로 나서는 아내 황미선씨의 삼겹살 사랑은 '부부 일심동체'의 하모니를 이룬다.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이후 생각지도 않았던 골재업까지 포함하면 1차 산업부터 서비스·교육사업까지 원없이 부딪치고 깨져봤다. 이제 오십을 코앞에 둔 나이에 청주삼겹살 골목의 지킴이로 자리잡은 김동진 대표(49·함지락 식당) “그동안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대며 전전한 것 같다. 나름대로 명분은 있었지만 그보다 소신과 열정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3년전 완전 백수가 됐을때 운전대를 잡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적이 있다. 제대로 한 게 없다는 자괴감이 날 짓눌렀다”

평소 웃음이 넉넉한 낙천주의자 김 대표가 눈이 붓도록 혼자 울었다니 뜻밖이다. 첫 직업이었던 기자 생활에 대한 추억은 어떨까 궁금했다. “군제대후 언론고시라는 시험준비에 매달렸고 4번의 고배 끝에 서울신문과 인연이 됐다. 돌이켜 보면 기자로서 우월감에 빠져 있는 동안은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자 면전에서 보여주는 존경과 대접에 우쭐해 하며 정말 속으로 강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진짜 기자가 되기위한 치열한 공부가 부족했다”

“하고싶은 일 하면 심적 여유 생겨”

하지만 젊은 기자의 근거없는(?) 자신감이 세상 한복판에 단기필마로 나선 동력이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영업의 거듭된 실패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복돋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 중에, 가장 감미로웠던 말은 “동진아, 사랑한다”라는 자신의 독백이었다. 정신적으로 유배생활 같은 고적한 날을 보내면서 내 삶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돈이나 명예보다는 자기가 하고싶은 일, 의미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생일에 김대표는 막내 제수로부터 이런 축하 문자를 받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아주버님, 정말 최고입니다’ 어쩌면 ‘최고’로 신기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었구나… “첨엔 웃음이 나왔는데 그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막대한 재산을 날리고 신체의 부자유를 경험하면서도 표시내지 않고 자신감을 잃지 않는 모습이 제수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내겐 고통과 분노의 시간이었는데…실제로는 운동을 통해 마음을 다잡는다. 요즘 테니스를 열심히 하는데 운동을 하고 나면 더 자신감이 생기고 심각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털어버리는 여유가 생긴다”

언제나처럼 그의 백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고 어떤 계시처럼 청주 삼겹살에 필(?)이 꽂혀 요식업에 ‘풍덩’ 빠졌다. “개인적으로 나주 곰탕을 좋아한다. 인구 9만의 도시에 곰탕을 먹기 위해 주말이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존경하는 민본주의자 정도전의 유배지를 찾아나섰다가 나주곰탕의 애호가가 된거다. 그런데 몇 번 곰탕을 먹고는 슬슬 화가 치밀었다. 우리 청주에는 그런 음식 하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때 청주 삼겹살이 떠올랐고 한범덕 시장님께 면담을 신청해 제안하게 됐다. 청주의 음식이 없는 게 아니라 몰랐던 것이고,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민족사관고 합격, 아내와 딸 합작품

새해들어 매달 3일마다 삼겹살 가격을 1인분 5천원으로 파격세일하는 이벤트도 김대표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처음엔 ‘말도 안되는 가격’이라고 반대하는 일부 업주들에게 ‘일단 청주삼겹살 골목의 맛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득했다. 예상외로 반응이 뜨거웠고 기대이상의 매출을 올리자 상인연합회는 야외 공연까지 보여주기로 했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가는 장소가 아닌 문화가 머무는 곳으로 고객들에게 추억거리를 주고 싶다. 통기타 가수와 섹스폰 연주 등으로 삼겹살 골목의 작은 음악회를 2월부터 선보일 예정이다. 성안길을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삼겹살 골목까지 이어지도록 해야한다”

청주 삼겹살 골목을 전국의 유명 음식거리에 비교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김대표는 1년이란 짧은 기간에 비한다면 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확신하고 있다. “삼겹살 대표 도시로서의 자긍심과 전국 유일의 삼겹살 거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때 진정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시설현대화 사업이라든가 효과적인 홍보, 경영혁신이 추진되면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는다”

작년 한해 삼겹살 지킴이로 바쁘게 살면서 중3 학부모로 마음을 졸였던 김대표의 집안에 경사가 생겼다. 큰딸 하은 양(17)이 상위 1%의 학생들만 도전할 수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최종합격 한 것. 자녀의 명문학교 진학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이라 했던가? “하은이의 영광은 온전히 아내(황미선·45)와 딸의 몫이다. 아내같은 엄마가 없다면 하은이가 준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하은이 스스로 흔들림 없이 밀고나간 것이 신통했고 아빠는 한 일이 별로 없다. 그냥 특별히 간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 준 것 뿐이다. 청주 삼겹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시민 여러분들이 꾸준히 응원해 주면 어느새 전국 최고가 돼 있을 꺼다”

권혁상 기자  jakal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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