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같은 정의, 강같은 진실

▲ 사진=육성준 기자

300세대가 넘는 공용주택에는 의무적으로 ‘문고’를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도서관이 있어도 운영할 사람이 없거나, 책은 있어도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가 있다. 아파트 도서관 운영의 모범사례로 떠오르고 있는 개신 주공 1단지 글마루작은도서관을 지난 12일 찾았다.

때 마침 도서관 학부모 동아리인 ‘오른발 왼발’에서 동화극장이 열렸다. 슬라이드로 펼쳐지는 동화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흠뻑 빠져들었다.

도서관 자리는 원래 입주자대표회의 회의실이었다. 김용규(46)씨가 지난 2009년 입주자대표회장을 맡으면서 도서관 건립이 추진됐다. 한 달에 한번 회의를 하는 공간보다는 아파트 1398세대에게 환원하자고 생각했다. 세대가 같이 사용할 공간을 계획하다보니 탁구장, 헬스클럽 등의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탁구대를 놓아도 몇 명만 사용할 것 같았다. 도서관이 떠올랐다. 소수가 독점하는 공간이 아닌 불특정 다수가 쓸 수 있는 공간으론 도서관이 제격이었다.

김씨는 바쁘게 움직였다. MBC느낌표 팀에 연락을 했지만 대기업으로부터 1억원의 스폰을 받아오라고 했다. 아파트 도서관을 지원해줄 근거가 부족하다는 답변도 들었다. 그러다가 지역구 의원이었던 김법기 도의원, 박용현 시의원이 재량사업비를 도서관 건립에 내놓았고, 문화관광과도 이에 근거해 지원을 해주면서 문제가 풀렸다.

2010년 4월 24일 글마루작은도서관이 개관했다. 원래 아파트 내 10평 남짓한 공간에 2000권이 넘는 ‘문고’가 있었지만 이제는 40평 공간, 책 8000여권을 소유한 어엿한 ‘작은도서관’이 됐다. “도서관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했고, 좋아했다. 개신 2단지, 3단지, 푸르지오 아파트, 인근 단독주택에서도 도서관에 온다. 도서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도서관 회원은 현재 900여명.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운영비와 전기료는 아파트 관리비에서 1/N로 나간다. 자체 책 구입비 30만원이 책정돼 있고, YWCA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도서관리사가 파견돼 도서관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운영했다. 올해로 2년 지원이 끝나는데 마침 청주시 작은도서관운영지원에 관한 조례가 만들어져서 최소한의 인건비를 지원받게 됐다. 앞으로 월 40만원이 도서관리사 인건비로 지원된다.

김씨는 청주시작은도서관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협회에는 47개의 작은도서관이 등록돼있다. 교회문고부터 사회단체 시설문고, 아파트 문고까지 내용도 프로그램도 천차만별이다. 그는 “작은도서관을 들여다보니 공간보다는 역시 사람의 문제가 더 컸다.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전문가 인력지원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마루작은도서관에서는 여름·겨울방학이면 특별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고정프로그램도 8개나 있다. 학부모 동화읽기 모임, 동요교실, 독서교실, 영화상영, 그림자극, 노래공연, 동화작가 초청 강연회, 숲해설(우리 아파트 나무 알기), 도서관에서 하룻밤 지새우기, 연극배우기, 인형극 공연 등 내용이 꽤 알차다. 지난해 10월 성화개신죽림동 축제에서는 동화읽기 엄마모임이 무대에서 그림자극, 슬라이드극, 동요노래 공연을 보여줘 박수를 받았다.

“책만 보는 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소통한다는 게 의미 있다. 공공도서관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을 작은도서관에서는 이룰 수 있다.” 그는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의 유기적인 네트워크와 상호대차 서비스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또 주민들 스스로 기획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는 공간, 그것이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도서관을 통해 큰 꿈을 꾸게 됐다. “취약계층이나 부모가 모두 일하느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마을마다 있는 작은도서관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정보와 교육관련 서비스를 한다면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도 있다.”

청주시내 작은도서관은 약 100개로 추정한다. 이미 70여개의 공동주택이 있는데다 사회단체 및 교회문고 등을 합치면 어림잡아 100개의 도서관이 있다는 것. 그는 “이러한 작은도서관들이 책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청주대 경제학과 86학번인 그는 운동권 세대다. 졸업 후 노동현장에 투신했고, 청주지역노동자연맹을 조직해 91년엔 징역도 살았다. 93년 YS특사로 나온 뒤 속리택시에서 택시기사로 10여년을 일했다. 98년 노동조합장을 맡으면서 58일간 파업도 이끌었다. 그렇게 숨 가쁘게 2·30대를 보낸 후 그는 40대에는 좀 말랑말랑해지고 싶었다. 김씨는 지금 오창에서 대정화학을 운영하며 화학약품을 6년째 납품하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장인 그는 아파트 주민들을 모집해 문화캠프를 정기적으로 떠나고 벼룩시장을 여는 등 아파트 공동체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김씨는 “권력이 바뀐다고 해서 없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공동체는 스스로 변하고 맑아져야 한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cb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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